동부개혁장로회신학교
성경영감과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신조 로 삼고
개혁주의 신앙훈련을 통하여 복음적 목회자를 양성하는
정통적 보수 신학교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 딤후 2:15

죽음이 죽었다

“소유나 존재냐”(To Have or to Be)의 작가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인간을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e)로 정의하였다. Homo는 흙이라는 Humus에서 온 단어로서 인간을 뜻하고 Esperanse는 희망을 뜻한다. 인간은 “희망하는 자”라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은 흙에서 시작되었으나 하나님의 형상이 된 절대희망의 존재이다. 사람에게 희망이 없으면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이 없다. 단테가 갈파(喝破)한대로 지옥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곳이다. 생지옥 아우슈비츠 감옥에서 살아난 빅터 프랭클 박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것은 다른 그 무엇보다 희망을 포기했기 때문이라고 증언한다. 

한창 이야기가 물오를 때 누군가 찬물을 끼얹는 것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희망 사항이구요....” 희망을 폄하한 것이고, 폄하한 희망으로 대화를 얼어붙게 만든다. 희망은 결코 헛된 바람이 아니다. 50%미만의 확률(確率)이 아니다. 적어도 기독교의 희망을 그럴 수가 없다. 기독교의 희망, 그 근거는 무엇인가. 부활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희망의 확실한 근거이다. 

저마다 치켜세운 맨해튼의 마천루(摩天樓), 영화에도 등장하는 브루클린 브릿지(Brooklyn Bridge), 패션의 메카 소호(Soho), 누구나 한 번쯤 보고 싶은 브로드웨이 뮤지컬(Broadway Musical). 많은 사람들이 동경(憧憬)해 마지않은 뉴욕이다. 이곳이 죽음과 가까이 있다는 것을 잠시 잊었었다. 

나는 뉴욕 현장에서 2001년의 9.11을 보았다. 수천 명 죽음 앞에 통곡을 들었다. 지금은 2020년 4월, 창문을 열기만하면 죽음의 냄새가 나는 것 같은 뉴욕에 또 살고 있다. 죽음의 영이 뉴욕에는 짙게 그리고 온 세상에 가득 차 있다. 눈만 뜨면 간밤에도 수많이 자들이 죽음의 물결에 휩쓸러 갔다는 소식뿐이다. 여러 소식들이 가슴을 메이게 하지만 오늘도 누군가 보내온 시신을 담은 검은 봉지가 여기저기 빼곡히 널려져 있는 영상에 충격을 받는다. 최고의 도시를 자처(自處)해온 뉴욕은 그 스스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그러나 이 도시에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부활이 우리의 희망이다. 왜 뉴욕뿐이겠는가. 온 세상에 단 하나의 희망이 있으니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죽음을 죽이셨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은 한 마디로 단절(斷絶)이다. 통상(通常) 세 차원의 단절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단절이다. 영적인 죽음이다. 둘째는 영과 육의 단절도 있다. 육체적 죽음이다. 그리고 셋째는 천국으로부터의 단절이다. 영원한 죽음이다. 단절은 이 셋만이 아니다. 우리는 또 다른 차원에서 단절의 아픔을 겪고 있다. 그것은 우리 대부분이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이다. 이 사회적 단절이 계속된다면 누구도 못 견딜 것이다. 사회적 단절은 죽음 못지않게 힘들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사회적 단절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일본에 그런 현상이 가장 심하다고 하여 일본어로 알고 있는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진정으로 무엇인지 우리 삶에 와 닿지 않았었다. 지금 우리는 타의(他意)적 “히키코모리”가 되는 것 같다. 너무 힘들다. 너무 외롭다. 너무 그립다. 내가 그 때 왜 그렇게 그 사람을 대했는지 후회도 된다. 

후회만 하고 있진 않겠다. 그리워만 하지 않겠다. 희망을 갖겠다. 왜? 희망이 있기 때문에. 희망은 뜬 구름이 아니다. 실체다. 예수님의 부활이 실체요 희망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단절의 죽음을 죽이신 사건이다. 그래서 부활의 단절을 연결로 바꾼다. 하나님과의 연결, 믿는 자가 그 날의 부활로 맞는 영과 육의 영원한 연결, 천국과의 연결은 예수님 부활이 가져다 준 희망이고 실체이다. 그리고 사회적 연결도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희망을 갖는다. 

코로나바이러스 정국(政局)이 끝나면 사회적 연결이 이전같이 되는 데 머물지 않을 것이다. 이전의 사회적 연결은 너무 이기적이었고 형식적이었다. 살았으나 죽은 것 같았던 관계가 진정으로 살아나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셨던 원형(原形), 하나님나라의 사회적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단절되었던 모든 영역에 희망을 갖듯이 죽은 것 같았던 옛 사회적 관계는 죽고 새로운 관계가 도래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죽이셨기 때문이다. 

 

04.11.2020


© k2s0o1d6e0s8i2g7n. ALL RIGHTS RESERVED.